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토실을 허물어 버린 설 (문단 편집) == 비판 == 저자인 이규보가 뛰어난 [[문인]]이며 이 글 역시 [[교과서]]에 실린 [[고전]]이라고는 하나, 위 수필에서 보이는 이규보의 생각은 무척 근거가 박약하기에 오늘날의 독자들에게 이규보의 행동은 상당히 주제넘는 기득권 짓거리로 결론 내려진다. 이규보는 글에서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하고 있다. 자연의 이치는 거스를 수 없는 것으로 [[겨울]]엔 추운 것이 당연하다. 그러니 토실을 만들어 겨울에 따뜻함을 누리려 하는 발상은 잘못되었으니 토실을 부수어 버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말은 [[논리적 오류/비형식적 오류#s-3.34|자연주의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 [[여름]]엔 덥고 겨울에 추운 것은 자연적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여름에 '더워야 한다'거나 겨울은 '추워야 마땅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옳지 않기 때문이다. 이규보의 논리대로라면 토실과 같이 인간이 생존을 도모하기 위해 자연에 [[적응]]하고 환경을 바꾸려 한 모든 시도나, 기술과 문화의 발전은 좋지 않은 것이니 없애야 할 것인데, 이러한 의견에 설득력이 있거나 받아들일 만하다고 볼 여지는 거의 없다. 이 밖에도 옛 성인의 법도를 지켜야 한다거나 사람이 [[두꺼비]]나 [[뱀]]처럼 살면 그게 상서로운 것이겠느냐는 곁가지 주장이 이어지지만 모두 같은 맥락에서 옳지 않다. 움막인 것을 이미 알고 있었음에도, 짐짓 모르는 체하면서 대화를 이어 나가며 갈굴 각을 잡기 시작하는 것 역시 오늘날의 지독한 꼰대를 연상케 하는 모습이다(...). 그럴듯한 해석은 아니지만, 얼핏 보면 [[무덤]]처럼 생긴 외관을 두번이나 언급한걸로 보아 외관상의 문제로 마음에 안 든 것이 아니었냐는 생각까지도 해볼 수 있다. 심지어 움막이라는 소재로 논의를 한정시켜도, 이규보 본인은 몰랐을 것이지만 인간은 [[움집]]에서 지낸 역사가 그렇지 않은 시간보다 더 길었다. 움막 역시 원시 시대부터 인간이 추위를 피하고자 고안해 낸 지혜의 산물인 셈인데, '옛날에는 안 그랬다'며 자연스럽지 못하다는 이유로 배격하는 것은 이견의 여지가 없는 이규보의 오판인 것이다. 게다가 글 말미에는 ''''그 재목으로 [[땔감]]에 쓴 뒤에야\''''라는 문구도 있다. 이규보는 토담집을 허물고 나온 나뭇가지를 자기 방 [[온돌]]을 덥히는 땔감으로 쓴 것이다. [[이중잣대|자연의 이치에 따라 겨울에 추운 것은 당연한 것이라면서]], [[내로남불|땔감으로 자기 방을 따뜻하게 하는 것은 자연의 이치를 거스르는 게 아니란 말인가?]] 그래놓고 자기 혼자 "마음이 비로소 편안해졌다"고 하고 있으니 주장의 일관성 역시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 결국 불을 피워 땔감으로 쓰는 것은 과거부터 해온 익숙한 일이니, 자연스럽고 올바르지만, 움막은 생소한 일이니 비판하는 것. 그런데 아이러니 한 점은, 그 소빙하기 이후의 온돌의 보급이 [[조선]]의 삼림 고갈을 가속화하고, 온 조선의 산을 [[민둥산]]으로 만드는데 일조했다는것(...) 오히려 이런 관점에선 움막이 더 자연친화적이다. 이러한 위 관점에서 [[버트런드 러셀]] 역시 [[노자]]의 자연사상을 비판한 바 있다. 정확히 말하면 노자나 [[장 자크 루소]]의 자연회귀 사상에서 자연이라고 부르는 것은 실은 그 작자가 익숙해 있는 것에 불과하고, 그들이 사악한 인위라 부르는 것들과 다를 바 없는 것이라고 평했다. 즉, 노자는 길이나 다리, 나룻배로 통행을 편하게 하는 것이 인위로써 자연을 거스르는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옷을 입거나 불로 음식을 익혀먹는 것과 같은 인위는 자신에게 익숙한 것이므로 인위로 보지 않았다는 논리이다[* 다만 러셀의 노자 비판과 이규보의 괴토실설에 대한 비판을 같은 맥락에서 보기는 힘든 것이, 노자의 자연사상에는 정치철학적인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그가 인위의 예시로 [[도로]]나 [[교량|다리]]를 비판한 것은 그런 대규모 토목공사를 위해서는 백성들에게 무거운 [[부역]]을 부과해야 하고, 이것이 백성의 삶을 힘들게 하기에 '그런 쓸데없는거나 만들지 말고 그냥 백성들이 편하게 살 수 있도록 가만히 놔두라'고 비판한 것이다. (그리고 당대 기준으로, 잘 닦인 도로나 교량은 사람들의 삶을 편하게 해줄수도 있지만 그 이상으로 [[전쟁]]에 유용하게 사용되는 경우가 많았다는 점도 감안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자기집 하인들이 좀 편안하게 지내는게 아니꼬와 토실을 허물게 한 이규보의 행태와 같은 선상에서 비교하기는 어렵다.]. 자세한 건 해당 항목의 3.3번 문단 참고. 무엇보다 주목할 것은 저자인 이규보의 삶이다. 오늘날 괴토실설이 '[[유교 탈레반]] [[씹선비]]의 일화'쯤으로 여겨지고는 하지만, 정상적인 유교 사대부의 관점에서 보아도 이규보는 도저히 옹호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애초에 이규보는 조선시대에서나 발견되는 정통 주자학자라고 볼 수 없는 고려시대 인물이며, 고려시대 유학자 중에서도 도가 사상에 상당히 경도된 편인 인물이다. 이규보의 해당 주장도 도가 사상에 근거한 바가 크므로 사실 이규보의 일화를 근거로 유교를 허학으로 비판하는 것은 상당히 엇나간 비판이다. 도리어 성리학이 득세한 이유가 도가 사상의 이러한 측면을 허학으로 규정하고 스스로를 실학으로 내세우면서이기 때문에, 도리어 적극적 성리학자일수록 이러한 행태에 비판적일 수 밖에 없다. 이규보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글솜씨를 가지고 있었지만, 오랫동안 출세하지 못하다가 [[최충헌]]의 [[무신정권]]기에 들어서야 최충헌에게 발탁되는 것을 시작으로 비로소 고위직을 밟게 된다. 최충헌의 아들이자 제2 대 최씨 집권자 [[최우]]는 [[강화도]] 천도 후 섬에 빙고를 지었다. 자기 집에 세워진 토실은 부숴 버리려 한 이규보도 최우의 빙고 건설에 손을 대지는 못했을 것이다. 즉 이규보는 겨울에 길쌈을 할 필요 없이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사는 상류층이면서도, 아들들(혹은 머슴들)이 집안일을 조금이라도 쉽게 해 보려 하니까 이에 공감하고 도와주진 못할 망정 오히려 엉뚱한 의견을 내세우며 방해를 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과거 교과서에서 '자연에 순응할 줄 아는, 소박한 [[자연주의]]적 면모를 보여주는 명문장가의 작품'으로 정신나간 마인드로 해석되어 온 괴토실설에 대해서, '무신 정권 부역자 꼰대의 억지 가득한 수필'이라는 비판적 해석이 인터넷 공간을 중심으로 비교적 늘어났다. 다만 기술의 발전을 탐탁잖게 여긴 전근대인은 생각 밖으로 많았다. [[온실]]을 헐어 버리라고 명했던 조선의 [[성종]]이 그 예시다. 동양만의 현상은 아니었다. 또한, 아예 인성과 별개로 이규보의 슬견설 같은 작품을 거론하며 그의 글재주와 논리를 옹호하는 오늘날의 사람도 많다. 그 외에도 그의 논리와는 별개로, 단순히 집 주인 입장에서 생각하면는 하인들이 멋대로 지어놓은 무덤같은 움막이 집의 미관을 해치는 걸로 보인다면, 이를 철거하도록 요구하는 것은 집주인의 정당한 권리라 옹호하는 의견도 보인다. 하지만 위의 본문은 자연의 이치 운운하며 추하게 굴었기에 까이는거지 미관상 안좋다고 했으면 이렇게 까지 욕먹지는 않았을 것이다. [각주] [[분류:고전 수필]][[분류:갑질 사건사고]][[분류:이규보]]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